엄마는 힐링중

[엄마는 힐링 중 #13] 사면초가 홀로서기 프로젝트

페이지 정보

작성일15-02-11 18:38 조회5,596회 댓글0건

본문

엄마는 힐링 중
 

사면초가 홀로서기 프로젝트

힐빙스토리

 

 

 

 

 막내의 대학 입시까지는 국방부 시계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군인처럼 잠자코 집안을 지켰습니다만 그 시간이 지나니 저의 숨겨둔 여행본능이 발동을 했습니다. 딱히 누가 정해준 것은 아니어도 대부분 아줌마들은 엄마 노릇의 심리적인 정년을 아이들 대학갈 때까지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스무 살 이후에는 집에서 돌봐 줄 일도 없을뿐더러, 그 다음에는 바깥에서 배우고 경험하며 자기 인생을 개척 하는 시기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이렇게 엄마 노릇의 강박에서 자체적으로 해제되는 시점이 드디어 저에게도 왔습니다. 마침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비장의 연설을 시작하였지요.

 

 “엄마는 너희들의 평생 시녀가 아니다. 엄마의 본분이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어린 아이가 마침내 제대로 홀로서기 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일이란다. 드디어 마지막 훈련에 접어들 차례다. 이제부터는 엄마 없이 서로 협조해서 집안을 운영해봐라. 잘 될 때까지 엄마는 계속 집을 비우게 될 거다. 너희들이 연습하는 동안 벌어질 엉망진창 단계를 참아낼 자신이 없으니 이참에 나도 힐링 여행이나 떠나 보련다.”

 

 머리는 참 잘도 돌아갑니다. 이렇게 명분도 살리고 실리도 얻을 수가요. 몇 년은 혼자 휘파람 불면서 여행 다닐 핑계를 만들어 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가족들은 그렇잖아도 점점 강도가 심해지는 엄마의 불평불만 잔소리가 갱년기에서 오는 우울증이거나 과다 스트레스 장애가 아닐까 우려하던 참이었으니 대놓고 뭐라고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습니다. 당장 생활은 불편해지겠지만 이 참에 엄마 잔소리 없이 맘 놓고 자유를 누려보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은가 봅니다. 엄마도 바람이나 쐬고 오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는지 딱히 붙잡지도 않고 ‘니 맘대로 하세요.’라는 듯이 수수방관의 자세를 취합니다.

 

 맞아요. 사실 저도 참을성이 바닥 난지 한참 되었습니다. 그동안 온갖 잡동사니 일거리에 갇혀 삐거덕거리는 가족들의 물렁뼈 역할을 하느라고 저의 감정 쓰레기통이 꽉 차버렸거든요. 고3에 이어 재수를 하게 된 아들의 학업 스트레스, 장래 준비를 하는 딸의 취업 스트레스, 위기에 몰린 남편의 가장 스트레스가 집안에서 맞부딪히지 않게 조율하는 것도 힘들더군요. 연로하신 부모님의 병치레도 이어지고 때마다 넘겨야 하는 가족행사도 만만하진 않고요. 잠시라도 헤어나고 싶었습니다. 선배 아줌마들도 엄마의 일이란 다 끝나고 쉬려면 영영 못 쉬게 된다면서 한가해질 때 무조건 자기 시간을 챙겨야 한다고 조언을 해주더군요. 하긴 이제 그럴 때도 되었잖아요?

 

 

thumb-3e249ca4b275cae46654c1ac48dc71c3_1

 

 

 김포공항을 달려가 제주도행 비행기 표를 끊었습니다. 남편의 명퇴 후 십년 째 귤 농사를 지으며 사는 친구에게 가려고요. 한참 귤 따는 일손이 부족한 때라 바쁜 중에 가면 뭐라도 도울 수 있을 테니 반겨 주겠지요. 나머지 시간에는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요. 어떨 때는 이리저리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여행이 피곤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산장 같은 곳에서 쉬고 싶지만 그건 또 얼마나 무섭겠어요. 요모조모 궁리를 해봐도 이 친구의 귤밭 농장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가족들도 가본 곳이니 훨씬 덜 걱정을 할 테고요.

 

 도시의 복잡한 삶에서 멀리 벗어나 맑은 공기 마시며 자연을 느끼고 몸으로 일을 한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힐링의 효과가 있더군요. 끊임없는 반복되는 농부의 힘든 일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하고, 낯선 환경에서 여행자가 된 홀가분함이 달콤한 기분을 끌어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제 감정의 찌꺼기들을 조용히 정리하는 동안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가끔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엄마의 도움 없이 사는 일도 그들에겐 꼭 필요한 훈련이지요. 두 눈을 질끈 감고 혼자서 꿀 같은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제주도에서 보름이나 시간을 보낸 후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안에 들어섰는데 우리 딸의 가정관리 능력이 저보다 낫습디다. 엄마 있을 때 보다 집안이 더 깔끔해졌어요. 서로 치댈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가족끼리 별 갈등도 없었다나요? 아니, 이럴 수가! 그럼 여태껏 제가 우리 집안문제의 원흉이었단 말이랍니까? 후덜덜. 갑자기 불어오는 퇴출 위기에 급히 몸을 사리고 있는데 친정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행 오가며 문안전화도 없던 딸을 너그럽게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물김치까지 만들어 놨다며 '네가 올래? 내가 갈까?'하십니다. 흐미. 정초부터 보름이나 비운 집에 처리할 일이 태산인데 돌아오자마자 친정엄마랑 ‘쎄쎄쎄’할 정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엄마는 오랫동안 집을 비운 딸의 심정적 변화나 갈등에 촉을 곤두세우고 한참이나 뜸했던 '교장선생님 훈화'를 줄줄이 날리고 싶으신 눈치입니다. 아니면 그간 외로우셨을 지도 모르겠고요.

 

 그래도 그렇지, 갱년기 아지매가 오랜만에 칼을 빼든 이 시국에 팔십 평생 살아온 깨달음을 '또' 설파하시겠다니 번지수를 잘못 찾으신 거지요. 머리가 딱 아파왔습니다. 평소에는 주거니 받거니 알콩달콩 잘 지내는 모녀 사이건만, 각자의 사는 방법에 관한 지적과 조언만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가족 안의 해법은 그 당사자들만이 찾아내야 할 성역이니까요. 이렇게 머리가 복잡할 때는 감정노동이 힘들어질 만남은 거절하는 게 상수입니다. 물김치 미끼까지 사양하면서 은근히 다음으로 만남을 미루려니 전화 속에서도 서운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홀로서기 잘하는 이 딸이 무척이나 야속한 모양이에요. 죄송하면서도 찜찜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말았습니다.

 

 왜 이리 살면 살수록 정답이라는 게 모호해질까요? 갑자기 우리 아이들 홀로서기를 열심히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심하게 고민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한숨처럼 제 입에서도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앞으로 가자니 물이요, 뒤로 가자니 불이로구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