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힐링중

[엄마는 힐링 중 #14] 술주정 센티멘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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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5-04-21 17:53 조회4,9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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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힐링 중
 

술주정 센티멘탈

힐빙스토리

 

 

 

 

 마감에 마감을 넘기며 질질 끌어 오던 보고서 하나를 오늘로 드디어 넘겼습니다. 마침 남편은 저녁 약속이 있대고 아들도 학원으로 나가 집안이 고요합니다. 여유를 부릴 만한 황금 같은 기회인 거지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감 기념 자축파티 삼아 와인을 한 잔 따랐습니다. 냉장고를 열어 곁들일 음식을 찾아봅니다. 뭐 대단한 걸 차리려는 건 아니에요. 좀 더 두면 변색되어 아예 못 먹을 것 같은 샐러드 한 접시와 먹다 남은 생선전이 눈에 띄네요. 이런 게 바로 아줌마들 전문 용어로 일명 ‘주부 뷔페’랍니다. 기회만 되면 이런 식으로라도 남은 음식을 해치워야 가정 식단이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내 집에서 나 혼자 기분 내는데 누가 구질구질하다고 뭐라 할 리도 만무지요.

 

 와인 한 잔을 곁들여 놓고 지난주에 놓쳤던 음악프로그램을 다시 보기로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습니다. 왜 남녀 연구할 때 다들 그러잖아요? 여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버릇이 있다. 저도 그래요. 멀거니 앉아 TV만 보기에는 갑자기 시간이 조금 아까워지대요. 요 며칠 우리 집 강아지 똘비를 길들이기 위해 개 트레이너에게 배워 두었던 ‘이리 와’ 훈련을 연습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놈이 요즘 들어 혼자 있을 때 부쩍 짖어대니 이웃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몇 번의 교육을 신청했었거든요. 그 선생님 말씀이 ‘이리 와’는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오도록 하는 개 훈련의 기초 명령어랍니다. 설마 개 훈련의 첫 단계라는 ‘이리 와’ 정도를 우리 똘비가 못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트레이너에게 매 주 훈련 상황을 보고하기로 약속한 터라 가벼운 숙제 해치우듯이 생각난 김에 한 번 해보기로 마음을 먹은 겁니다.

 

 모든 동물 훈련에서는 반드시 보상이 따라야 한답니다. 뭐가 없을까 둘러보니 벌써 색깔이 죽어가는 샐러드 안주가 테이블 위에 플라스틱 통 째로 놓여 있습니다. 그 위에 아들이 먹다 남겨 놓은 닭백숙 가슴살을 찢어서 올리고 나름 구색을 갖추었다며 먹고 있었던 참이었지요. 그 고기를 조금 뜯어 손에 감춰 들고 우리 집 강아지를 불러 대었습니다.

 "똘비야~ 똘비야"

 허참, 그런데 이 놈이 웬 일인지 귀만 쫑긋거리면서 경계를 하고는 제 근처에 올 생각을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소파에 앉아 쉬면서 강아지를 불렀던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좀 편히 앉아 있을라치면 기어이 제 무릎으로 올라오고 싶어 하는 그 녀석을 밀어내기에만 바빴었지요. 가끔 귀 청소나 빗질을 해주려고 부르긴 했었지만 그럴 때면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소파 밑이나 테이블 아래로 숨어버렸고요. 오로지 부엌에서 고기를 썰 때나 접시에 남은 음식을 치우면서 부를 때에만 쏜살같이 달려왔던 것인데, ‘우리집 강아지 똘비는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온다.’는 식으로 저 혼자 믿고 있었나 봐요.

 

 처음 아이들이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자고 했을 때부터 못마땅하기는 했었습니다. 개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허락을 했지만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던 식구였던 만큼 저는 늘 그 놈에게 'B사감'처럼 굴었어요. 언제나 '제까짓 것"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했지요. 그러던지 말던지 그 놈은 언제나 저에게 변함없는 짝사랑을 보냈습니다. 가족 모두 외출했다가 우르르 현관문으로 들어설 때도 유독 저만 쫒아 다니면서 겅중겅중 반겨주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언제라도 저의 부름에 달려올 거라고 자만하고 있었던가 봐요.

 

 그런데 오늘 막상 ‘이리 와’를 연습하려고 먹이까지 들고 부르니, 이 놈이 멀뚱멀뚱 쳐다만 보면서 영 가까이 오지를 않는 겁니다. 갑자기 왜 저러나?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하는 표정입니다. 다시 부르니 멈칫거리며 1m 전방까지는 다가오는데 더 이상은 오질 않고 극히 경계하는 표정입니다. 나중에는 아예 손에 있는 먹이까지 내보여가면서 꼬여 보았지만 그래도 그냥 째려보기만 하더군요. 아니, 이럴 수가! 저 놈은 날 좋아했던 게 아닌가 봅니다. 우리집안에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일인자로 각인되었기에 그게 두려워서 충성을 바친 것일까요. 그것도 모르고 이 놈은 언제나 저를 사랑하다 못해 흠모까지 한다고 착각하며 살았다니 이게 웬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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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가슴으로 뿜어내는 사랑의 열창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방청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센티멘털 범벅인데, 그런 배경음악을 깔고도 제 앞에 선 강아지는  반응이 없습니다. 한두 잔 와인으로 보통 때보다 감성적이 된 이 주인의 촉촉한 부름마저 외면하고 도통 꿈쩍을 안 합니다. 주인이 닭고기를 미끼로 자신에게 무엇을 하려는 짓인지 저울질하기에만 바쁜 꼴입니다. 흑.

 

 혹시 나머지 가족마저 다들 그런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갑자기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식사가, 포근한 잠자리가, 평안한 일상이 날아 갈까봐 겉으로만 좋아하는 척 해줬을 뿐일 수도 있잖아요.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엄마의 노래 소리로 여겨보자고 겨우겨우 참으면서 겉으로만 웃어준 건 아니었을까요? 우리 남편도 괜히 마음에 있는 소리를 내놓았다가는 돌아올 보복이 두려워 매번 스리슬쩍 넘어갔던 건 아니었을까요?

 

 믿었던 강아지에게서 받은 충격 때문인지 갑자기 외로운 마음이 촉발되더니 연이어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똘비를 데려다 무릎에 당겨 앉히고 쓰다듬으면서 목을 간질간질 “그랬니? 그랬니?"하고 물어봐도 이놈이 아예 저와는 눈도 마주치지를 않으려듭니다. 오늘따라 이 뻣뻣한 주인이 왜 이렇게 별스럽게 구는가 영 의심스러운 모양입니다.

 

 어쩌면 저는 그동안 이 개를 사랑한 게 아니라 돌봐주기만 했던 것일까 반성이 되더군요. 물론 우리 가족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과연 그들을 제대로 사랑이나 했었던 걸까요? 그들은 또 저를 사랑했을까요? 그들과 나 사이에 "보살핌"이란 매개가 없더라도 말입니다. 아, 저는 오늘 저녁 한 잔의 와인과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노래와 강아지 한 마리로 급격하게 감정의 파도를 타고 있습니다. 이건 누가 뭐래도 알코올의 효능입니다. 그래서 결국 술주정 센티멘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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