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는 사춘기

[할매는 사춘기 #6] 누구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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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4-05-26 17:10 조회4,8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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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의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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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이던가...

힐빙스토리
슈리슈바

 

 

누구이던가, 내 몸의 밧줄을 풀어준 사람들

 

  내가 말을 시작할 때가 언제쯤인지 기억 못하듯이 글을 처음 배웠을 때 또한 기억하기 어렵다. 학교입학 하기 전에 글을 읽거나 써본 기억이 없으니 글자를 깨우친 것은 학교를 통해서였을 터인데 그 과정이 어땠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뛰어난 것도 눈에 띄는 것도 없는 어린 계집애가 처음으로 어른들의 칭찬을 받은 것은 열 살쯤 되어서 였다.

  

  작문시간에 우물쩍 거린 몇 줄 안 되는 삼행시 같은 것을 선생님은 어머니께 보여드렸고 당시 병석에 누워계시던 아버지는 천천히 읽으신 후 이렇게 말씀 하셨다.

 

  “공책에 줄을 맞추어 반듯하게 쓰거라”

  주목받을 만한 것이 없이 성장하면서 내 안에 어렴풋이 자리 잡은 것은 글을 잘 쓰면 칭찬을 받는다는 애매한 자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또 어떻게 써야 잘 쓰는지 아무것도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뒤 10년이 지난 열다섯 살 쯤. 집안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그 댁에 갔을 때였다.   문상객도 별로 없는 가난한집 쓸쓸한 초상이어서 미아리 공동묘지로 출상하고 난 뒤 나만 홀로 남아 집을 지켰다.

  그때나 지금이나 겁이 없는 편이어서 초상집이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따사로운  초봄이었다.

 

  열린 판자대문으로 몰골이 더러운 탁발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들어섰다.

쪽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내가 늙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집식구들은 모두 묘지로 가고 혼자 집을 보고 있노라고 했다.

 

  가난한 초상집에  먹을 게 없었던 기억이건만 팥떡 조각을 그 스님께 주었던 것 같다. 떡을 다 먹고 물 한 대접을 말끔히 비운 스님은 내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학생은 장차 이름이 크게 알려 질 거야. 글을 잘 써서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큰 인물이 될 것이야” 그런 예언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런 이야기들은 수도 없이 많다.  스님들이 시주를 하러 다니다. 어느 집에서 “이 댁에 아드님이 큰 병을 얻어 누워있군요.” 어느 산 어느 나무뿌리를 달여 먹거나. 어느 골짜기 큰 바위에 공들여 기도 하라는 등. 그렇게 했더니 감쪽같이 나았다거나. 환자가 벌떡 일어섰다는 이야기들. 혹은 “이집에 큰 기운이 뻗쳐  큰 인물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를 구하는 용맹한 장군이 나거나 어린 천재가 태어나 높은 정승판서가 되었다는 등.

 

  그 스님의 그따위 예언을 곧이 믿을 만큼 순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은 중도 아닌 것들이 장삼을 입고 구걸 비슷한 시주를 얻으며 사람들에게 적잖은 피해를 준다는 소문이 흉흉해서 그 정도의 상식은  지니고 있었다. 그 스님은 아직 어리다 해도 좋을 여자아이가 혼자 초상집을 지키다 팥떡 쪼가리나마 허기를 채워 준 게 고마워 그냥 한마디 내뱉은 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말은 묘하게 내 관심을 한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는 시인이 될지 모른다는. 그냥 막연하게 시인이라야 진정한 글을 쓰는 사람이므로 시인이 될 거 라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하게 된 것이다. 자연히 공부와는 무관한 엉뚱한 시를 읽고 외우는 일을 취미 삼았다. 남이 보기에 근사한 시를 읽거나 외우려니 영시가 가장 그럴듯해서 예이츠, 바이런, 위즈워드 등.  계통 없이 외우기만 했을 뿐이다.

 

  뜻도 모르고 외우기만 몇 년 하다 보니 이골이 나서 스무살 쯤에는 그게 낭만주의 문학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인간이 바라는 것들은 나중에 다 이루어 질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어  감미로웠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의구심이 솟아났다.

 

  현실은 가난과 비천함으로 고통스러운데 미래에는 잘 될 거라는 꾀송거림이 당장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건 아니다.  빈궁한 젊음은 점점 난폭해져갔다. 미래에 대한 신념이 가득 찬 인간을 보면 지금도 부정적인데 그것은 인간의 진실이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의심하는 게 마땅하다고 여기는 삐딱함이 지금도 뼛속 깊이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인문학적인 모든 사상을 송두리째 가짜로 여겨 말이나 글로 떠벌리는 족속을 싸잡아 경멸까지 하게 되었다.

 

  철자가 틀린 채로 이발소며 쌀집이며 식당이나 집들이 선물로 흔해빠진 푸쉬킨의 시를 적은 액자가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어쩌구라는 푸쉬킨의 싯구조차 모르는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어쩌면 그 시절 그런 난폭한 정서 탓일 것이다.

 

  망가진 선풍기며 라디오. 자주 하는 이사 때 마다 허름한 집의 수리나 전기배선은 물론. 아궁이 수리. 뒤틀린 문짝. 아이들 장난감도 손수 만들어 줄만큼 많은 잔재주가 많은데다 쓸데없는 공상이나 상상이 전혀 없는 성실함도 평생 결혼을 후회하게 만들지 않은 점이었다.

 

  글을 조금 쓸 줄 안다는 마누라가 남편을 도운일 두어 번 있기는 있었다. 그것은 남편이 육군대학에 다닐 때  논문을 대신 써준 일이다. 남편은 선후배를 만나 저녁마다 정치적으로 눈도장 찍기가 바빠 논문들을 쓸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군사학이란 1,2차에 걸친 세계대전쟁사가 주된 교과목이었다. 어른 베개짝 만한 책들은 한문과 영어가 마구 섞인 재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것이었다.

 

  아무런 수사학적 장치가 없는 문장으로, 오로지 객관적 진술만이 가득한 재미없는 글에서 이 대목 저 대목을 엮어 주관적 상상력을 동원해 편집을 했다. 주어와 동사만 있으면 나머지 채우기는 대충의 상상력만으로 가능한 것이다. 덕분에 지금도 나는 글의 힘도 인정하지만 글의 허약함도 조금은 꿰뚫어 볼 줄 알게 되었다.

 

  그 방대한 전쟁사에서 독일의 롬멜이 사막에서 어떻게 고분했는지. 영국의 패튼장군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서술할 수는 있었지만 어느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한지 저열한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것. 도덕적으로 그것을 가리지 않는 전쟁사를 도대체 왜 공부를 하려는 것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무서웠다. 악과 폭력과 야만성을 정당하게 공부한 장교들은 상대를 죽이고 이기는 것만 배웠으니 나라를 거머쥐고 도덕적 부끄러움이 없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악과 폭력 위에 합리적 이성으로 포장된 채 양육강식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 양육강식이고 그것을 정당화 한다면 굳이 인간이라고 할 필요도(짐승의 세계에서는 정당화 할 수 있으므로) 문명이라는 낱말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희망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냈으므로 짓밟혀 가면서도 승복 할 수 없는 운명도 또한 갖고 있다. 그런 모습을 살펴가며 인간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증명해가야 된다는  것. 그것이 글이 갖는 숭고한 사명이라는 것.  글은 그렇게 써야 된다는 것을 .그리도 많은 진지한 사람이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낭만주의 문학의 사명감 또한 미래에 대한 긍정적 사고이며 그렇게 인간과 소통하려는 천재들의 노력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소설이나 시나. 모든 문학에서 개인사적인 경험 없이는 단 한 줄도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그간의 내 고통을 쓸데없는 반항으로 허비만 하였구나.

 

  사십대에 나는 대전에서 살았는데 아무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만 가면 그냥 한적한 시골이었다.

  주로 금산가는 쪽으로 나가 들판 어디를 휘적거리고 걷다 그럴듯한 나무 밑이나 다리 밑. 개울가에서 혼자 시를 썼다. 뭐 시랄 것도 없는 문장들을 하루에 다섯. 열편도 쓴 적이 있다.

  중언부언하는 글속에는 별의 별 개소리가 전부였지만 써야 된다는 절박감만 팽만했다. 물론 나는 시를 쓰지만 시인은 아니라고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따위 글을 쓰면 쓸수록 마음은 더 답답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흰머리가 내려앉고 둥지를 제주도로 옮기고 새 사위를 보고 평범한 장모가 되었다. 시집간 딸에게 먼 제주에 사는 친정엄마는 딸이 그리워 편지를 종종 보냈다. 어느 날 사위가 내게 물었다.

 

  “어머님. 글을 정기적으로 써 보시지요. 아무이야기나. 생각나는 대로. 어머니는 글을 쓰고 싶은 내재된 욕망 때문에 현실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그걸 풀어보세요"

  청천 벽력같은 소리였다. 내 주제에라는 자기비하로 중무장한 내 뿌연 내면을 사위는 알아 본 것이다. 그런 게 어떻게 눈에 보이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머님이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살아오는 동안 내 환경이나 생긴 것을 말한 사람은 많지만 내 안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직접 가리켜 말한 사람은 없었다. 사위의 격려덕분에 내안에 가시덩굴처럼 겹겹이 쌓여있던 수많은 두려움들. “내 주제에  글은 무슨...” 같은 것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노매드를 처음 알았을 때 천박한 것들의 놀이마당인줄 알고 내 맘대로 얕보고 마구잡이 글을 썼다. 그때 지금의 원조 한량패거리는 마치 짜고 그러는 듯이 내 글에 굉장한 호감을 보여주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마구잡이 글이 조금씩 가닥이 잡힌 것은 지금 사장님이신 윤용인씨의 개인지도 덕분이다. 친절하게도 글을 가다듬거나 앞뒤를 분간케 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사위와 함께 그는 나에게 스승이다. 나 같은 사람도 더 멀리 더 높게 보라고 가르치는 이를 일컬어 스승이라는 말이 생겼으리라.

 

  지금은 낯 뜨겁게도 글 쓰는 사람대접을 꼬박꼬박 받고 있다. 내가 보고 느끼고 고민하고 즐거웠고 고통스럽던 일들을 글의 힘을 빌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동어반복에 갇힌 내가 더 이상 기술적으로 표현할 길이 막막하다는 절망감과 내가 옳다고 여겼던 가치가 과연 맞기나 한지에 부딪혀 지금은 머뭇거리고 있을게 현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이다.

 

신년에 의례적인 인사를 많이 받았다.

그중에 노매드에서 일한다는 이 아무개라는 분의 신년 인사를 받았는데

예의 낯간지러운 소리. ‘박 완서씨 같은 글. ’ 어쩌구 였다.

읽으며 피식 웃었는데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글의 내용으로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젊었는지. 늙었는지(노매드에 사장님보다 더 나이 먹은 사람은 없겠지만)전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미디어 분야에서 일을 하다 사장님의 은근한 압력으로 두어줄 인사를 했을 가능성도 많았지만 그때. 나를 옭아맨 밧줄이 하나 툭 끊어졌다.

사실 내안에 동여맨 밧줄을 툭툭 끊어준 사람들은 평생을 통해 있어왔다.

“글이 너무 좋았어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어쩌면 내 이야기와 그리 똑같은지 몰라요”

그런 말들. 그런 말로 한 가닥씩 줄을 끊어준 사람.

 

아주 훌륭한 문인이 안되면 어떠랴.

유행가처럼 그때 한순간만 좋아 흥얼거리다 쉽게 다른 노래로 마음이 옮아가도 유행가는 그때 그 순간만은 풍요롭게 해주지 않던가.

불멸만이 소중하지 않다. 모든 게 다 불멸한다면 세상은 쓰레기로 그득 할 것이다.  고맙기도 하지.  내 밧줄들 끊어준 사람들.

그 푸르른 말들이 있어 내 삶은 계속 될 것이다.

누구이던가. 내 몸에 칭칭 감겨있는 밧줄을 끊어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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